혁신의 지름길, 일곱 갈래를 제안합니다
우리 지역에 멈추거나 막힌 사업, 유휴 부지, 폐교 같은 자산이 있다면, 그것이 출발점입니다.
지역혁신은 길고 어려운 길입니다. 합의를 이루고, 건물을 짓고, 조직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는 데만 몇 년이 걸립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사례DB에 쌓인 성공사례 341건의 '숨은 성공요인'을 모아 읽다 보니, 지름길을 찾아낸 곳들이 있었습니다. 거창군은 세계 유일의 승강기 전문대학을 세우면서 캠퍼스를 짓지 않았습니다. 문을 닫게 된 폴리텍대학 캠퍼스를 2008년에 넘겨받아 2010년 3월에 문을 열었습니다. 구례군은 분양이 더뎌 비어 있던 농공단지를 통째로 내놓고, 2011년 6월 단지 전체 면적을 한 번의 협약으로 채웠습니다.
이들이 찾은 것은 새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지역에 이미 있었지만 쓸모없다고, 실패했다고, 너무 흔하다고 치워 둔 것들이었습니다. 그 가치를 다시 보고, 새로 엮어서 출발했습니다. 혁신에도 지름길이 있었던 셈입니다.
카드를 다시 읽으며 그 지름길을 일곱 갈래로 정리했습니다. 우리 지역을 떠올리며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 규제로 막힌 사업
이런 것이 있다면 새 법이 없어서 못 한다고 접어 둔 사업.
다시 볼 관점 새 법을 기다리기 전에, 기존 조항에 이미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은지 검토합니다.
새로 엮을 방법 막힌 사업을 다른 법에 이미 마련된 근거 조항과 엮습니다.
참고 사례 서천군은 100원 택시가 교통 관련 법과 공직선거법에 막히자, 근거를 지방자치법의 주민 복지증진 사무로 옮겼습니다. 지원 대상을 택시가 아니라 주민으로 정하자 시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농어촌 원격 협진은 의사가 환자를 직접 진료하는 원격진료가 허용되지 않자, 농어촌 보건의료 특별조치법이 이미 허용한 보건진료 전담공무원의 진료에 화상 장비를 추가했습니다. 영국 브리스톨은 아이들이 거리에서 노는 날을 만들면서 새 법을 기다리지 않고, 1847년 법에 근거한 길거리 파티 절차를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둘. 멈춘 사업과 팔리지 않던 상품
이런 것이 있다면 중간에 멈춘 공모사업, 이용이 끊긴 제도, 만들었지만 팔리지 않던 특산 상품.
다시 볼 관점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남은 재고로 봅니다. 멈춘 사업에는 이미 확보한 명단, 받아 둔 허가, 만들어 둔 상품, 지어 둔 시설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 엮을 방법 남은 것에 다른 운영 주체를 연결하거나, 다른 용도를 부여합니다.
참고 사례 일본 오노미치시가 2002년 개설한 빈집 공가뱅크는 2007년 6월 계약을 마지막으로 신규 등록이 끊겼습니다. 빈집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소개할 물건이 없어 제도 운영이 멈췄습니다. 2009년부터 지역 NPO가 시와 업무를 분담해(시는 등록 심사, NPO는 정보 제공과 상담) 제도를 재가동했습니다. 보령은 1996년 출시한 진흙 화장품이 잘 알려지지 않자 1998년 판촉 행사로 진흙을 바르는 축제를 열었고, 그 행사가 지금의 보령머드축제가 됐습니다.
서천은 갯벌을 매립하는 산업단지 계획을 접고, 그 대신 국립생태원과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을 받았습니다. 매립하려던 서천 갯벌은 2021년 '한국의 갯벌'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이탈리아 남티롤에서는 농가들이 객실을 내놓고도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농민조합은 숙소를 새로 짓는 대신, 이미 객실을 보유한 농가 740곳을 1998년 첫 카탈로그에 함께 수록하고, 자체 품질 기준을 만들어 직접 검사하며 등급을 매겼습니다. 지금은 1,600여 곳이 그 브랜드를 사용합니다.
셋. 사람의 손끝에 있는 지식
이런 것이 있다면 수십 년 한 가지 일을 해 온 어민, 농민, 장인.
다시 볼 관점 사라져 가는 전통이 아니라, 아직 전수되지 못한 유산으로 봅니다.
새로 엮을 방법 그 판단을 기술(드론, 데이터, 인증)과 엮거나, 흩어진 역량을 한곳에 모읍니다.
참고 사례 신안군은 드론과 인공지능으로 갯벌의 낙지 숨구멍을 찾습니다. 알고리즘이 탐지한 구멍을 갯벌에서 하나하나 확인하며 정확도를 90% 넘게 끌어올린 것은, 수십 년 맨손으로 낙지를 잡아 온 어민들이었습니다. 순창군은 흩어져 있던 고추장 장인들을 한 마을에 모았고, 그 마을이 2004년 전국 1호 특구의 기반이 됐습니다.
넷. 닫혀 있던 땅
이런 것이 있다면 군사시설 보호구역, 반환을 앞둔 부지, 범람원이나 개발이 제한된 땅.
다시 볼 관점 쓸 수 없는 땅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선점하지 않은 땅으로 봅니다. 이권이 얽히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강점일 수 있습니다.
새로 엮을 방법 닫힌 땅과, 그 땅을 좋아할 사람들(서퍼, 작가, 시민)을 엮고, 행정은 개방에 필요한 절차(허가, 기관 협의)를 맡습니다.
참고 사례 양양의 서피비치는 40년간 출입이 통제됐던 군사제한구역이었습니다. 2015년 양양군이 공유수면 점·사용을 허가하고 군부대와의 협의를 지원하면서 개방됐습니다. 대구에서는 오랫동안 도심을 가로막던 미군 캠프워커 헬기장 부지를 반환받아, 대구시가 그곳에 도서관과 잔디광장을 조성했습니다.
다섯. 매주 사람이 모이는 곳
이런 것이 있다면 경로당, 마을회관, 지역신문, 오래된 마을회나 장학회.
다시 볼 관점 시설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관계망으로 봅니다. 누가 언제 오는지 아는 곳은 새 서비스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전달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새로 엮을 방법 사람들이 이미 모이는 곳에 새 서비스 하나(돌봄, 문화, 디지털 등)를 더합니다.
참고 사례 옥천에서는 1989년 군민 222명이 주주로 참여해 세운 옥천신문이 사단법인을 육성했고, 이 사단법인이 청산면 문화공간 청산별곡에서 매주 반찬 310인분을 만들어 31개 마을 경로당에 배달합니다. 신안군은 무료 경로식당과 식사 배달을 맡은 단체에 식재료비와 급식 기자재, 보건증 비용까지 조례로 지원하고, 경로당에는 노인일자리 급식 도우미를 배치합니다. 합천군은 관내 경로당 528곳 전부에 공공와이파이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마을방송과 영상 연결을 추가했습니다. 부산 영도의 깡깡이예술마을은 마을이 보유한 옛 유치원 건물을 개보수해 생활문화센터를 열었고, 1층 마을다방은 60년 넘게 이어 온 대평동마을회 주민들이 직접 운영합니다.
여섯. 분양이 안 된 단지, 비어 있는 공장
이런 것이 있다면 분양률이 낮은 농공단지나 산업단지, 가동을 멈춘 공장.
다시 볼 관점 나눠 분양해야 할 땅이 아니라, 한 상대에게 일괄 제공할 수 있는 단일 부지로 봅니다.
새로 엮을 방법 빈 단지 전체와, 이전할 곳을 찾고 있는 한 상대(협동조합, 앵커 기업)를 엮습니다. 이때 지역이 받을 몫(생활 인프라, 일자리)을 협약에 함께 명시합니다.
참고 사례 구례군은 용방농공단지 전체를 한 협동조합에 내놓았고, 그 부지에 들어선 자연드림파크는 2016년 511명이 일하는 사업장이 됐습니다. 2015년 군 보건의료원이 4년 만에 산부인과를 다시 개설할 때는 입주한 협동조합 측 재단이 장비와 인건비를 부담했습니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은 필립스가 떠난 공장들을 철거하기 전에 시세의 절반 수준으로 임대해 3년 만에 약 6만㎡를 채웠고, 그 임대수입이 개발 사업을 뒷받침했습니다.
일곱. 문을 닫는 학교와 건물
이런 것이 있다면 폐교, 문 닫는 캠퍼스, 비어 가는 어린이집이나 생활관.
다시 볼 관점 빈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수용하도록 이미 지어진 곳으로 봅니다. 교실과 강당과 기숙사는 처음부터 여러 사람이 모이고 배우고 머물도록 만든 공간입니다.
새로 엮을 방법 지역의 대표 품목 하나와 그 품목을 가르칠 기관을 엮으면 전문 교육 거점이 됩니다. 마을 사람들의 모임과 엮으면 마을회관이 되고, 청년 창업과 엮으면 일터가 됩니다.
참고 사례 거창군은 문 닫게 된 캠퍼스를 넘겨받아 승강기 전문대학을 열었고, 고등학교도 새로 짓지 않고 공업고의 교명을 바꿔 승강기고로 전환했습니다. 광주 청춘발산마을은 문 닫은 구립 어린이집을 마을회관으로 바꿨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시작하는 법
일곱 갈래를 들고 우리 지역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갈래마다 하나씩만 적어도 출발점이 7개 생깁니다.
둘을 골라 엮어 봅니다. 문 닫는 학교와 매주 모이는 사람들, 멈춘 사업과 규제로 막힌 사업, 닫힌 땅과 손끝의 지식. 갈래 하나보다 둘을 엮을 때 새로 마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이건 쓸모없다고 누가 정했나'를 물어봅니다. 같은 자산도 누가 보유하느냐에 따라 부담이 되기도 하고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사례DB에는 이 일곱 갈래에 해당하는 사례가 더 있습니다. 카드마다 '숨은 성공요인' 칸에 그 사례가 무엇을 다시 보고 무엇과 엮었는지 기록해 두었습니다.
꼭 짚어볼 점
한 가지는 함께 적어 둡니다. 미국 애슈빌의 강변 아트지구 이야기입니다.
프렌치브로드 강변의 옛 공장 건물들은 값이 저렴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도심에서 밀려난 작가들이 그 헐값을 보고 모여들었고, 허리케인이 오기 직전에는 창고 26동에 작가 300여 명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시는 10년에 걸쳐 자전거도로와 주차장과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 글이 말해 온 지름길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값이 저렴했던 이유는 그곳이 범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2024년 9월 허리케인 헬레네로 강물이 24.67피트까지 올랐고, 아트지구는 전체의 80%를 잃었습니다. 108년 만에 기록이 깨진 수위였습니다. 애슈빌시의회는 이듬해 1월 기준홍수위보다 2피트 높여 건축하도록 조례를 개정하고, 기존 건물에 적용하던 예외를 폐지했습니다.
버려져 있던 것에는 버려진 이유가 있고, 다시 활용할 때는 그 이유도 함께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지름길을 고를 때 물음 하나에 함께 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버려진 이유는 무엇이고, 그 이유가 지금도 그대로인가. 이유가 사라졌거나 우리가 감당할 수 있으면 지름길이고, 그대로 남아 있는데 못 본 척하면 나중에 그 값을 치릅니다.
지역혁신데이터랩 사례DB — '숨은 성공요인' 칸을 채운 카드 341건(2026년 9월 기준) 판독
- 하나. 서랍 속 조항 — 서천 희망택시 · 농촌 원격 협진 · 브리스톨 Playing Out
- 둘. 멈춘 사업과 팔리지 않던 상품 — 오노미치 빈집재생 · 보령머드축제 · 서천 정부대안사업 · 남티롤 농가민박
- 셋. 손끝의 지식 — 신안 드론 낙지자원관리 · 순창 장류산업특구
- 넷. 닫혀 있던 땅 — 양양 서피비치 · 대구 캠프워커 반환부지
- 다섯. 매주 사람이 모이는 곳 — 옥천 청산별곡 · 신안 경로당 사랑방 · 합천 경로당 공공와이파이 · 깡깡이예술마을
- 여섯. 분양이 안 된 단지 — 구례 자연드림파크 · 에인트호번 스트라이프-S
- 일곱. 문 닫는 학교와 건물 — 거창 승강기 클러스터 · 광주 청춘발산마을
- 꼭 짚어볼 점 — 애슈빌 강변 아트지구
일곱 갈래 가운데 우리 지역에 해당하는 것을 하나씩 적어 보시고, 그중 둘을 엮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막히거나 멈춘 사업, 손끝의 지식, 닫힌 땅, 매주 모이는 곳, 빈 단지, 문 닫는 학교. 처음부터 짓지 않고 출발할 수 있는 길이 거기서 보입니다.